160221_대니쉬걸을 보고- 영화

0.
내가 그동안 아무 드라마나 영화를 안본건 아님미다...
마는,
미드 탐험 하느라 시즌별로 완주까진 안하고 오락가락 한 것들이 많아서
딱히 적기 애매한 부분이 있고,

미드라는게 보다보니까
뭐 시즌별로 감상평을 남길만큼 시즌별 완결성이 있지 않은게 대세인거 같아서
(그렇다고 시즌6, 7을 다보고 평을 남긴다는 것도 작품을 평가한다는 것도 웃기지 음.
왜냐고? 이미 내 머리속에는 많은 것들이 있지 않을 거기 때문에?)
뭐 여차저차 해서 적기 애매하게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아라카와도 다시보고,
매드맨 시즌2도 보(다말)고
하우스오브카즈도 보(다말)고
갑자기 한국 예능으로 세서
케이팝스타 정주행하고
뜬금없이 jtbc의 나홀로 연애중 정주행을 한뒤
육룡이 나르샤를 8편까지 후두루루루룩 보다가
음 정도전이 정도전을 더 잘 그렸다고? 하고 정도전도 한 두어 편 보고
앗 이러면 안돼, 영어!영어!
하면서 왕좌의 게임 시즌3을 다시 정주행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드라마 일대기.

영화는...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도 개봉하자마자 보고(언제적부터 거슬러올라오는거냐...)
내부자들은 우연한 기회에 한번 보고, 우연한 기회에 디 오리지널까지 한번 더봤다...
(그런다고 영화가 더 좋아지진 않아...)
캐롤이란 영화도 다정이가 보자고 제안해서 보고...
(올해 최악의 영화 자리에 노미네이티드 되었다)

그리고 데니쉬걸도 보았다.
(분명 뭐 더 많이 봤는데, 상기한대로 나의 기억력이 이정도다...)
그나마 무슨 얘기를 해볼만한 작품이 나왔으므로 한번 정리를 해보도록 하게따.



1.
데니쉬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머리속의 상황은
마치 닭꼬치를 꿰기위한 닭고기들이 이리저리 널부러져 있어서
이 방향으로도 꿸수 있을것 같고, 저 방향으로도 꿸 수 있을 것 같은 와중에,
어떤 방향으로 몇번 꿰어야 남는 고기 없이 가장 완전하게 다 꼬치로 꿸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는 그런 象이다.

음 아직 잘 가늠이 안되므로 첫 고기부터 일단 손 가는대로 꿰면서 다 꿰지나 살펴보자.


영화 초반은 자신의 고향 풍경을 계속해서 그리는 남자 화가 아이나와
인물화를 주로 그리는 게르다의 결혼생활을 그린다.
아이나는 유럽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반면, 게르다의 인물화는 외면받고 게르다는 의기소침해 하지만,
문제인식이 명료하고, 장난끼 다분한 게르다는 그럭저럭 아이나와 살아간다.

그러다가 게르다의 다리모델을 위해 스타킹을 신고 치마단을 장착하는 아이나는
자신 안에 설렘이 있음을 느낀다
고 감독은 표현한다. (아이나 포인트1)
(갑자기 옷깃을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쓸어올리는 장면은..음 좀 오글거렷다. 왜지?)

그러다 원래 아이나는 가기 싫어했던 무도회에
여장해서 다른 인격인양 가는게 어떠냐는 게르다의 제안,
아이나는 다시 설렘을 느끼고 계획에 동참한다.

무도회에서 어떤 남자에게 키스당한 아이나는 마음속의 어떤 문이 열린 것을 느끼고,
그 키스장면을 지켜본 게르다도 그것을 직감한다.

아이나의 변장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에스컬레이트 되고,
무도회에서 만난 남자와 밀회를 즐기지만,
종국에는 그 남자가 아이나가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접근한 것이지 여성적 매력에 빠진 것이 아님을 알게 되어 멘붕.

병원을 찾아 다니며 아이나의 내적 갈등에 대한 해답을 찾아 헤매지만,
1920년대의 유럽에서는 그저 아이나의 증상들에 대한 비정상을 명명하기 바쁘다.
그러다 와그너바그너인가 하는 특이한 의사를 만나서
최초의 성전환 수술을 시도하고
결국 아이나는 죽는다.
(수술의 성패는 중요하지 않다)



3.
초반부에 가장 인상적인 전개는
아이나가 릴리를 현실로 끌어내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정말 내가 생각하는 가장 완성된 형태의 전개였다.
서로 장난치듯이, 게임하듯이 흥미를 발전시켜나가는 것.
둘다 별다른 금기의식 없이 톡톡 튀는 가벼움으로 전개해 나갔다.
이 점이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좋은 부분이었다.
이 부분 때문에 나머지 부분들에 대한 이 모든 아쉬움들이 생겨나 버린 건지도 모른다.
이렇게 잘 내면의 욕구를 그려냈는데
그 욕구를 흘려내는 과정이 너무나 엉망이어서 드는 절망적인 아쉬움.

초반부에서 감독은 전반적으로 노골적이고 명료한 방식의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힘있는 전개를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힘있고, 어떻게 보면 투박하리만치
감독은 노골적으로 한 장면에 한 문장,
문장문장으로 전개하는 논리야 놀자 느낌으로
하고 싶은 말을 쭉쭉 진행 시킨다.
투박함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뭐 딱히 하는 말이 틀린 말이 없으니 봐줄만 하다.

그런 전개 속에서 의미심장하게 되새겨볼만한 포인트를 짚어보면,
게르다와 아이나를 교차시키면서 보여주는
시선을 받는 것이라는 주제.
게르다가 초상화를 그리면서 모델을 서고 있는 사람에게 하는 말은 의미 심장하다.
시선받는 것을 당신이 허용하기만 하면, 시선은 익숙해질 것이다
굳이 들으려고 한게 아니라
토스 시험 보고 들어간 후유증으로 영어로도 문장을 들었는데
저 동사가 allow가 아니라 비슷한 느낌의 다른 단어였는데 기억이 안난다.으으..
이 주제를 감독은 꽤나 공을 들여 다루면서,
아이나의 초반부 연기는 거의 대부분 남들의 시선과의 케미라고 봐도 될 정도다.

그리고 실제로,
감독은 (인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릴리라는 캐릭터를 거의 이런 기준으로 구현하고 있다.

생각을 해보자.
성정체성이란 과연 개인적인 문제일 수 있는가?
아니다.
개인적인 문제라면 고민이 갈등으로 커지지 않는다.
그저 여자처럼 행동하고 싶으면 행동하면 되고 하다가 다르게 행동하고 싶으면 바꾸면 된다.
'고민'이 '갈등'이 되는 순간은 반드시 개인이 자기 내면의 욕구대로 움직이지 못할 때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아이나라는 캐릭터가 사회성이 결여된 캐릭터인가?
그래서 릴리라는 캐릭터로서만이 사회적인 생활이 가능한가?
우리는 어떤 한 캐릭터만을 '진짜' 나라고 정의하고
나머지 캐릭터들은 타인이, 사회가 만든 것이라고 그 진정성을 부정할 수 있는가?

여기서 영화 플롯의 첫번째 어긋남이 생긴다.
영화는 인간 내면의 캐릭터들을 하나하나의 '인격'처럼 인식한다.
그래서 아이나는 마치,
'하나의 몸에는 하나의 인격' 이라는 구호를 전제한 것처럼 움직인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가?
우리 안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설레임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다양성이 중요한 이유는,
어떤 하나도 거세당하고는 온전한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릴리가 소중한 이유는 어느 인격이라도 소중하기 때문이지
아이나가 가짜고 릴리가 진짜여서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오해는 흔한 것이라 이것 자체가 영화를 망친 것은 또 아니다.
영화가 어그러진 것은,
감독이 진짜 이걸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착각을 아이나에게 국한해서 표현해내야만
그 착각의 원인이 한스와 키스한 아이나에게 보여진 아버지의 모습에 의해 생긴 것임을 그릴 수 있고,
아이나로도 살 수 있지만,
릴리를 억압해온 세월이 너무 길어서 릴리에 미련을 갖고 있는 아이나의 인지부조화 상태를 그릴 수 있고,
그래야만 아이나가 무리하게 2번째 수술을 고집하고,
수술 후 죽어가면서 흘리는 눈물 속에 있는 말들,
'나는 온전해 졌어'라는 말의 자조적인 의미를 살릴 수 있었을텐데

감독부터가 아이나가 왜 이렇게 릴리에 집착하는가?
라는 질문에 '릴리가 진짜 인격이니까?' 라는 뉘앙스로 대답하고 있어서
이 모든 슬픔들이 다 무의미하게 되어버렸다.
그러고는 마지막 장면은 마치 고향에서 화장재를 뿌리듯이
스카프를 날려 보내면서 게르다의 아련한 웃음으로 마무리.
플롯이 산으로 가고 있다는 반증이랄까.
감독은 아이나가 수술하다 죽은게 잘됐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가고 있다.



4.
중반부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아이나의 연기다.
오우 남자일때가 훨씬 잘생기고 여자일때는 어색하기 그지없는데도
그 감내하는 갈등의 강도가 너무 쎄서
어어어? 하는 새에 죽음까지 몰아치는 느낌이다.
영화감독으로서의 감독의 자질이랄지,
배우의 연기력이랄지 증명하는 듯한 느낌.

그리고 등장하는 멋진 한스,
와 게르다의 썸이랄지,
아이나의 갈등을 함께 짊어지고 가는 게르다의 내적 갈등.
이 둘의 관계를 흔한 불륜으로 이끌지 않고
서로에 대한 내적 신뢰를 갖고 기다리는 캐릭터로 그린 것은
매우 성숙한 인간의 모범적인 모습인 동시에
뭐랄까,
섬세한 내면적 불안이 호흡을 지배하는 영화속 세계에서
이 세상것이 아닌것인듯 느껴질만큼 이질적이다.
저렇거 자신의 좋아하는 마음을 스스로 잘 알고,
더 나아가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자기 마음을 유지하면서 기다려 줄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이나는 왜 그모양인가?
태생적인 차이?
태어날 때부터 남자의 몸에 여성의 인격을 갖고 태어나서?
그런 말들은 대답이 되지 않는다.
그에 대한 해답은 차후로 미루더라도,
한스와 게르다의 캐릭터가 아이나의 혼란스러운 내면 세계를 이해하는데에
오히려 방해로 작용하고 있는 느낌은 지우기 힘들다.



5.
종반부는 아쉬운 것들 투성이다.
가장 아쉬운 장면은 역시 마지막 장면일것이지만,
중간에 등장한 백화점 종업원 장면도 큰 아쉬움이 남는 장면이다.
1차 수술에서 안정적으로 회복한 아이나가
백화점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동료 여자들과 하하호호 하면서 행복해하는 모습.
끼리끼리 몰려서 복도를 걸어가는 장면은
정말 별로였다.
그게 아이나가 꿈꾼 생활인가?
ㅋㅋㅋㅋ
또래 여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처럼 노는게 여성이라는 성의 정체성인가?
거대한 착각이다.
성적 정체성이라는 것은
어떤 행동을 하면 잃어버리고 어떤 행동을 하면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태어난 상태 그대로 주어질수밖에 없었고, 이미 나를 구성하고 있는 무엇이다.
또한, 어떤 내집단에 대한 소속감은
성적인 문제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남자아이건 여자아이건 또래집단에서 안정감을 얻고,
집단에서 따돌려질까 두려워하고,
그 안에서 '차이'를 '우열'로 착각하고
장난스럽게 어울리다가 기분나빠지면 싸우는 것은 똑같다.
그런데
마치 여자무리에 잠입하는데 성공하니까 행복해하는 모습을 거듭 강조해서 보여주는 것은
적어도 슬픔을 함께 깔면서 보여줬어야 했다.
본질적인 충족이 아니라는 전제를 분명히 하고 보여주었어야 했다.
왜냐하면 보는 관객은 그 장면을 통해서
아이나가 진짜 자기 자아를 성취했구나 라고 오해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장면을 넣을 거였으면
감독은 아이나의 욕구가 여러가지 뒤엉켜서 여성화라는 집착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음을 보여주었어야 했다.
착각의 정도가 깊어져 원래 릴리를 드러내던 때의 욕구와는 다른,
여성화 수술의 어떤 복합적인 욕구들이 엉켜 있음을 보여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냥 하하 호호.
열심히 연습한 여자 움직임 흉내에 속아넘어가는 여자들,
남들을 완벽하게 속이는데 너무나 만족해서 그 일이 속이는 일이라는 것조차 잊어버린
추락하는 비행기와 같은 아이나와 함께
작품도 어딘가 알수 없는 곳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6.
그렇다면 이제 한번 꿰어 보자.
어쨋거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니 만큼
아이나를 행복하게 살리는 결말은 선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나가 죽는 정해진 결말 속에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플롯은 아마도 이런 것이다.


1) 아이나에게는 여자옷을 입는 다는 행위에 대한 취향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욕구가 어떤 것인지를 특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은
남자로 태어난 아이나로서 갖고 있는 욕구라는 점이다.
아이나가 여성의 옷을 입으면서 느끼는 설렘과 만족감이
진짜 여성이 여성의 옷을 입으면서 느끼는 그것과 같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한 아이나가 여성의 옷을 입고 싶어하는 욕구가
곧바로 여성이 되고 싶어하는 욕구라고 이해하는 것도 커다란 오해다.
아이나는 남자로서 여성의 치장을 하고 여성처럼 이 사회의 거리를 오가고 싶었던 욕구가 있었다.
이 사실 하나만이 중요하다.


2) 그의 여자로서 행동하는 취향은 어릴 때 타의에 의해 크게 왜곡되었다.

앞치마를 한 채 한스와 키스한 그 날,
아버지에게 일방적인 구타를 받으면서,
아이나의 마음 속에는
'이 욕구는 절대 드러내서는 안되는 욕구'라고 고정되어 버린 것이다.
전에도 언급한 적 있는 바,
인간은 내면에 있는 욕구들 중 어느 하나가 진짜라서 그것만 충족시키면 살 수 있는 장치가 아니라
내면에 있는 욕구 중 어느 하나라도 억압이 되면 제대로 살 수 없는 장치로 생겨먹었다.
다른 욕구들을 충족시키면서
예술과 성적 욕구(게르다의 발목 이야기), 부부 간의 관계 등을 통해 자아를 성공적으로 실현해온 아이나는
그러나, 결국에는 그 억압된 욕구에 도달하게 되고, 
그 마음을 직시하게 된다.
(그러므로 릴리가 등장한 것은 게르다의 책임도, 예방해야 했던 사고도 아니고 필연적인 자기 성찰의 과정이었다)


3) 그의 내면에는 여러가지 취향이 동시에 존재한다.

작품에서 가장 잘 표현되었던 그 부분, 그 부분이 핵심이다.
아이다가 이해해주는 역할이고 게르다가 감정적인 표현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 둘이 평등한 관계라는걸 알 수 있는 부분은
그들이 각자의 취향을 표현할 수 있고, 상대의 그것을 존중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중요하다.
어떤 취향이건 판단의 근거를 사회적 일반성에 두지 않고 인간적 완전성에 두고 보아주는 것.
아이나가 어떤 취향을 갖고 있든,
그 취향에는 이유가 있다는 믿음.
이 취향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저 취향은 사회적으로 익숙하지 않아서 이해할 수 없어.
라고 말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은 없다.
이 둘이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무도회장에 여장을 하고 가면 재밌겠다는 발칙한 발상을 제안하고 그걸 함께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욕구에 대한 열린 태도 덕분이다.

이러한 태도는 기본적으로 고정된 욕구를 상정하지 않는다.
왜냐면 욕구는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공식화된 욕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욕구라는 것은 매 순간 모두 다른 강도로, 모두 다른 각도로 발생하는 것이며
일어난 그 때 바로 실행하지 않으면 억압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게르다는 적어도 이러한 욕구의 원리에 대해 밝은 사람이다.

그리고 차분히 돌아보면 알 수 있는 몇가지 사실들은,
아이나의 내면에는 책임감을 통해 보람을 느끼는 취향,
여자를 남자로서 만족시키면서 만족을 느끼는 취향,
주어진 틀대로 움직이면서 안정감을 느끼는 취향들도 실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릴리라는 갇혀있던 캐릭터가 드러났다고 해서,
그가 평생 살아온 그런 만족감들이 다 거짓이 되는 것일까?
그 동안의 인생이 전부 억압되고 왜곡된 욕구에 의한 가짜 취향들이었을까?
그런 무리한 논리가 필요한 이유는 인간에게는 하나의 캐릭터만 있어야 한다 라는 경직된 전제 뿐이고,
우리는 그런 경직된 전제를 갖고 있을 필요도 없고,
실제로 우리 삶을 통해서 인간의 내면에는 다양한 캐릭터가 동시에 존재하며,
오히려 그런 복합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당연한 것임을 안다.

캐릭터라는 것은 무엇일까.
인격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마음에서 일어나는 설렘, 떨림.
어떤 상황에서 어떤 떨림이 일어나는 사람인가를 아는 것은 그 사람을 아는 것과 같을 것이다.
더 필요한 것은 그 사람이 처해있는 조건들을 고려하는 것 뿐.
어떤 상황에서 어떤 설렘이 일어나는가.
이걸 단순히 '취향'이라는 한 단어로 말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더 이상의 적절한 단어를 나는 모르겠다.
그런 취향들이 8개씩 갖고 있는게 인간이라면,
그 취향들의 얽히고 섥히는 복잡함을 감히 일반화하는 것은
정말 깊은 인간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저 폭력에 그칠 작업일 것이다.
어쨋든,
그래서 아이나가 여자옷을 입을 때의 설렘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감독이 심어준 키워드까지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면,
그가 이렇게 숨어있는 취향을 갖고 있는 이유는,
남들이 자신을 구경거리로 삼는 것을 싫어하는 취향과
남들의 시선을 즐기고 싶은 취향을 둘다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무슨 논리적으로 말도 안되는 말이냐고 묻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닭다리를 먹고 싶은 욕구와 돼지고기를 먹고싶은 욕구가 부딛치지 않아야만 하는가?
파란옷을 입고 싶은 마음과 빨간 옷을 입고 싶은 마음이 왜 항상 하나만 일어나야 하는가?
그 둘은 그냥 별개의 욕구다.
욕구는 여러개가 동시에 존재한다.

이건 사족이지만,
그가 여장을 하고 싶은 욕구는 무슨 내 성적 정체성을 위해서 사회에 대항하는 그런 거시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아마도 남들이 시선을 받는 역할을 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남자가 이쁜 여자에게 주는 시선만큼 적나라한 애정의 시선이 또 있을까.
아이나는 밀도높은 애정에 피사 되는 것에서 어떤 설렘을 느낀 것이다.
(사실 꽤나 해보고 싶은 일이다)
그 시선은 사실 남자로서 살아가는 삶에서는 맛보기 힘든 어떤 것이다.
(물론 오늘날 한국에서 몸짱 훈남 남자로 살아간다면 뭇 여성들에게 충분히 받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밌게도, 그것은 여자로서는 받기에 어렵지 않은 어떤 것이다.
정리하면, 그는 여자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이쁜 여자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닌가.
남이 주는 관심에 상관없이 잘못 갖고 태어난 남성을 여성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옳고 그름에 대한 취향이 아니라
옳고 그름따위 상관없이 남이 주는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이쁜 여성이 되고 싶었던게 아닌가.
추측해본다.


4) 그는 억압된 욕구에 대한 반발로 아이나를 죽여가면서 릴리에 집착한다.

그에게 아이나는
이전까지의 삶이다.
그가 져오던 책임이다.
억압은 맺힐때 폭력적으로 누른만큼 풀어질때 폭발적으로 풀어진다.
마치 청소년기에 공부만을 강요받고 대학에 간 학생이
대학에 가서는 비정상적으로 책따위는 보지 않고 사는 것처럼.
누가 보아도
릴리를 재발견한 이후로 아이나를 버리고 릴리만을 향해가는 아이나의 태도는 비정상적이지만
그 이유가 작품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마치 릴리가 진짜 인격이어서 그렇다는 식)
하지만 분명 그의 릴리에 대한 몰두는 일상생활을 파괴하는 수준으로 일그러져 있으며
그러한 일그러진 생활은 반드시 어떤 스트레스와 억압 상황이 상정되는 현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릴리를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던 어린 날의 그 사건일 것이다.

만약 일그러져 있지 않았다면,
그의 여장에 대한 취향은 그의 삶에서 충분히 소화되었을 것이고
그의 인생은 또다른 취향들을 향해서 흘러갔을 것이다.
취향은 단지 놀이이고 게임일 뿐이다.
릴리도 그랬다.
그의 작품활동도 그랬고, 그의 사랑도 그랬다.
모든 사람이 어느날 여장을 하고 무도회에 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진 않지만
누구나 그런 충동이 일어날 수 있다.
출입을 막아놓은 공사장에 들어가보고 싶을 수도 있고,
여자 탈의실을 몰래 보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은 공사장에 불량아처럼 들어가보고 싶다고 이미 다니는 학교를 자퇴하진 않는다.
또는 여자 탈의실을 들어가고 싶다고 남자 탈의실에 들어가기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냥 누구나 했을 수 있는 놀이이고
누구나 가질 수 있었던 충동인 것이다.

아이나는 그걸 거부했다.
게르다가 요구한 것은 많은 것이 아니었다.
릴리를 없애라는 것도 아니었고
아이나가 옳다는 얘기도 아니었다.
다만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아이나로서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아이나는 그걸 거부했다.
이전에 보여주던 부부 간의 신뢰를 생각해 봤을 때,
이건 분명 비정상적인 반응이고,
타의에 의한 억압이 존재함을 감지할 수 있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이나 개인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아이나라는 인물 뒤에서 휘몰아치며 무너져 내리는 어떤 힘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감독은 다루지 않았지만.)
다시말하면,
아이나라는 개인은 이제 이 이야기에서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된 것이다.
그는 자율성을 잃고 반응할 뿐이다.
그의 반응은 그의 이야기를 담아내지 못하고
그에게 작용한 어떤 힘의 존재를 상기시킬 뿐이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은 그의 부모의 억압이나 사회적 분위기, 그가 내면화한 억압구조 등은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


5) 아이나가 죽은 이유는 그 자신의 착각 때문이다.

영화를 통틀어 한 장면을 가장 긴 시간동안 비춰준 장면이 바로
2차 수술 후 죽기 직전 아이나가 게르다에게 울면서
'난 완전해 졌어'
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 눈물을 5초 가까이 노골적으로 비춰주는 감독의 의도는 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아이나는
'내가 뭐길래 이런 사랑을 받는걸까'
라는 대사를 남기는데
재미있는 대사 조합이다.
아이나는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비정상적인 '고집'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을.
그런 고집을 이렇게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사랑의 가치에 대해서 스스로 감동할 만큼.
어떤 고집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는가?
사회적으로 금지된 릴리를 갈구했던 것이?
그렇지 않다.
자신 안에 릴리를 키워가는 그 과정에서
남자로서 갖고 있던 다양한 취향들을 짓밟고,
자신으로서 맺어오던 사회적 관계들을 모두 부숴버렸기 때문에
그는 살아가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누구도 죽으라고 한 적 없지만
스스로가 자신의 취향을 제한한 채로는
어떤 세상에서도 살 수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갖고 있는 취향 모두를 발휘하고 살아야만 한다.
어떤 한심한 삶이라도 모두 활용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평등한 것이다.
아이나가 죽은 이유는 자신의 일부만으로도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착각 때문이다.
릴리만 될 수 있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것이라는 믿음,
릴리가 아닌 자신은 다 버리는 것이 더 온전히 릴리가 될거라는 믿음.
다른 자신들을 모두 챙길 때에만 릴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 그가 죽은 이유다.
(몸을 잘못태어났네, 동성애를 이해못하는 사회에서 태어났네, 부인이 구박했네 하는 이유가 아니다)


6) 결국 아이나가 죽을 때, 남은 것은 게르다의 수준 높은 사랑, 뿐이다.

감독이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 순간 이후,
그의 정체성이 아이나건 릴리건
그는 작품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러면서 인물로서 흥미롭게 부각되는건
게르다라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자기 감정에도 충실하고,
말로도 잘표현하고
그림으로도 잘 표현하고
해야할 일이 있을 때는 상황에 맞춰서 움직일줄도 알고
인간에 대한 연민의 취향도 갖고 있다.
장난칠 줄도 알고 진지할 줄도 안다.
이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거의 무슨 남자가 바라는 여자의 모든 덕목을 다갖춘 양 그려지고 있다.
그녀의 내적 갈등은 단 한번 밖에 나오지 않는데,
아이나가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보이콧하면서 생긴 심리적 외로움과
그 때 옆에있던 한스에 대한 혹하는 마음 뿐이다.
그나마도 갈등 수준에서 쇼부보고 전혀 불륜의 관계로 빠지지 않는다.
(185에 얼굴도 훈남인데 아버지가 대기업 총수고 공부도 잘하는데 운동도 잘하고,
단하나의 단점은 외로움을 많이 탄다는 점이지만 절대 바람은 피지 않는 남자 같은 느낌이랄까)

재밌는건,
한스도 거의 비슷한 급이라는 점이다 ㅋㅋㅋㅋ
그도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면선도 절대 선을 넘어서 요구하지 않는다.
친구의 여자에 호감이 있으면서도 친구를 소중히 하는 마음도 전혀 바래지 않고 진중하다 ㅋㅋ
정말 멋진 사람 둘이 아닐 수 없다.(진심)


7) 결말은 아이나가 죽으면서 통한과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깨달으면서 끝났으면-

어설프게 웃음으로 죽음을 추도하면서 끝내는게 아니라
극적으로 몰아쳐서 맞이한 죽음인 만큼,
아픔을 공유하고 성장하는 흐름으로 가는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쓰기 시작한지 10시간이 넘어가자 무슨 소리를 하고 있었는지 까먹었다)

어쨋든 후진 영화는 아니다.
진정성있게 다가가려는 영화적 시도는 좋았다.
별점은 별 세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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